설교 말씀

[17/08/27] 승급시험

2017.08.28 09:56

이현옥 조회 수:181

2017/08/27


“승급시험"

 

(창세기 22:1-12)

[창]22:1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창]22:2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창]22:3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창]22:4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창]22:5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창]22:6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창]22:7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창]22:8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창]22:9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창]22:10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창]22:11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창]22: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1.

     대학교 졸업반 때 중학교로 교생 실습을 나갔습니다. 한번은 시험 감독을 들어갔는데 이상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당시는 모든 시험문제가 다 객관식, ‘맞는 번호 또는 틀린 번호를 고르시오였습니다. 모두들 열심히 시험 문제를 풀고 있는데, 뒤 쪽에 앉아 있는 한 아이가 문제를 하나씩 읽어보고는 연필을 두르르 굴립니다. 그리곤 답을 씁니다. 말로만 듣던 연필 굴려 시험 본다는 아이를 처음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다했는지 시험지를 덮어 놓고 잠을 잡니다. 그러더니 시험 종료 5분 남았다고 가르쳐 주니까 부스스 일어나더니 다시 연필을 굴립니다. 시험이 끝난 후, 왜 다시 연필을 굴렸냐고 했더니 검토한 것이랍니다.

 

     시험! 참 피곤한 것입니다. 잘 하다가도 시험 본다면 아이 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긴장합니다. 정말 시험이 없는 나라, 그런 세상은 없을까요? 우리에게 시험은 그렇게 부정적인 것일까요? 오늘 우리는 큰 시험을 당한 사람을 만납니다.

 

     2.

     아브라함, 우리가 일반적으로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사람입니다. 즉 믿음의 원조가 아브라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믿음의 사람들이 나왔다는 뜻입니다. 대체 그의 믿음이 얼마나 대단하고 훌륭했기에 그랬을까요? 그것을 짐작할 수 있는 모습이 오늘 성경 본문에 보입니다.

 

     그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백세에 이르러 아들 하나를 얻었습니다. 백세에 얻은 아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얼마나 귀했겠습니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런 귀한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더니 청천벽력과 같은 요구를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아,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려라!’

 

     말씀을 가만 보면 하나님도 참으로 얄궂으십니다. 그냥 네 아들을 번제로 드려라가 아니라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라고 표현하십니다. ‘네 아들로도 아버지는 눈물이 핑 도는데, 그 아들이 어떤 아들이라고요? ‘네 사랑하는’. 하나님도 아십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것도 독자’, 즉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임을 아십니다. 아니, 그냥 네 아들을 번제로 드려라 해도 되는데 왜 이리 콕 콕 집어서 말씀하시는 걸까요?

 

     그것도 번제로 드리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번제는 제물을 잡아서 그것의 각을 떠서, 즉 칼로 살을 덩어리로 도려내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입니다. 아들, 그것도 사랑하는, 그것도 독자를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말도 안 되는 요구이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다구요? 아브라함은 순종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과연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답다고 합니다.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아들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모리아 땅으로 떠났고, 그곳에 이르러 사환들을 떼어놓고 아들만 데리고 산에 올라 결국 아들을 잡아 번제로 드리려고 눈을 따악 감고 칼을 뽑아 들었습니다.

 

     이때의 상황이 얼마나 다급했던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하고 급하게 두 번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성경의 기록된 하나님의 호출은 대개의 경우 한 번만 부르셨습니다. 두 번을 연거푸 부르신 것은 그만큼 다급하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이 놀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곤 그의 믿음을 인정해 주시며, 대신 준비해 놓으신 숫양을 주셔서 제사를 드렸고, 아브라함은 그곳을 여호와이레’ “여호와께서 준비하심이란 귀한 이름을 붙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보면서 우린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기에 당연히 그런 시험쯤은 통과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곤 믿음은 아무런 저항 없이, 고민 없이 그저 라고만 대답하는 것이라고, 마치 아니오란 대답은 입력되지 않은 로봇과 같은 사람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우리는 여기서 본문에 정직해야 합니다. 1절에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란 말씀과 12“...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이것은 시험이었습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없는 로봇과 같은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선 무엇 때문에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을까요? 그저 명령만 내리실 것이지. 더욱이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까지 말씀하실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면 아들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시험은 어떠한 의미가 들어 있는 건가요?

 

     3.

     우리가 쉽게 생각하듯이 아브라함은 본래부터, 선천적으로 그토록 완벽한 믿음의 소유자는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결과만을 보고 말합니다.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보지 않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영광, 화려함만을 보지 그 속에 감춰진 수고와 아픔, 노력은 보지 않습니다.

 

     그저 결과와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고 말하려고 합니다. 한 사람이 그 위치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수고와 노력, 아픔이 있었는지에 대해선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곤 그는 본래 특별한 사람이니까 가능하고 나는 평범하니까.... 하면서 노력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본래 믿음이 좋은 사람인가요? 모태 신앙자 인가요? 선입견을 버리고 아브라함을 생각해 봅시다.

 

     아브라함은 노아의 12대 손으로 홍수 후 3백년 경, 곧 주전 2천년 경에 갈대아 우르에서 데라의 아들로 출생하였습니다. 갈대아 우르는 이른바 세계 3대 문명의 발생지의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우상을 섬기던, 지금의 이라크 지역 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철저하게 우상을 섬기던 지역에서 태어나 우상을 섬기던 사람들 속에서 자랐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 데라도 우상을 만들고, 우상을 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가만 두었다면 아브라함도 그 직업을 이어 받아 우상을 만들고 섬겼을 것입니다. 그는 알게 모르게 우상 숭배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도와 우상을 제작하였을 것입니다.

 

     그 영향이 얼마나 크고 심각했던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택하시고는 곧 바로 그곳을 떠나라고 명하셨습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12:1) ? 그곳에서, 그 심한 우상숭배의 기운이 짓누르고 있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성결한 백성으로 거듭나기가 쉽지 않기에 아예 떠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만큼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온전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거의 우상숭배의 분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가 하나님에 대하여 얼마나 아는가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만큼도 몰랐습니다. 6:2-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이니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아브라함뿐만 아니라 이삭, 야곱조차도 여호와 하나님에 대하여 정확히 알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저 하나님을 전능의 하나님, 큰 힘의 소유자로 알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자신을 가르쳐 주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정확히 알 수 있는 길은 뭔가요? 성경을 통해서 입니다. 그 외에는 부분적으로, 대부분 막연한 창조주, 절대자 정도로 알 뿐입니다. 그러기에 후에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심으로 자신을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셨고, 마지막에 예수님을 통하여 더욱 자세히 알려 주셨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들은 아브라함보다 더 정확히, 더 많이 하나님에 대하여 압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단순한 절대자 신으로의 하나님만을 알았을 뿐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그는 초신자에 불과합니다. 절대자가, 조물주 신이 존재하는 것은 알지만 그 분에 대하여 완전히 알지 못했습니다.

 

     창 12장에 보면 그는 말씀에 순종하여 하란 땅을 떠나서 가나안으로 긴 여행을 하여 왔습니다. 가나안!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땅입니다. 그런데 그 약속의 땅에 이르렀으면 거기서 정착하고 살아야 할 것인데, 그 지역에 가뭄이 들자 미련 없이 애굽으로 내려가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지시도 없었고, 하나님과 상의도 없이 그는 먹고 살기 위해 약속의 땅을 버리고 애굽으로 가버렸고, 그 곳에서 애굽의 바로가 자기 부인을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자기 누이라고 속이기까지 합니다. 우상숭배하던 지역, 고향에서 배운 버릇이 그대로 나옵니다.

 

     그 후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도 역시 부인을 자기 누이라고 거짓말하여 죄짓게 만들었습니다. 아직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기에는 그는 너무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공의의 하나님인 것을 몰랐고, 능력의 하나님인 것을 몰랐기에 가나안을 버렸고, 이웃을 속였습니다.

 

     그 뿐인가요, 그는 하나님께서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무수한 자손을 주시겠다고 했음에 그것을 기다리다가 지쳐서 스스로 첩을 얻어서 지금의 아랍계의 조상인 이스마엘을 얻는 결정적인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그는 본래부터 믿음이 좋은, 절대 순종하는, 불순종이 전혀 없는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예스만을 답할 수 있는 그런 꼭두각시 같은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실수투성이의 초신자에 불과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많은 시행착오, 실수를 거치면서 그는 점점 하나님에 대해 배워갔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배우지만, 아브라함은 경험에 의해서 점점 알아갈 뿐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이런 순종, 불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생겨갔습니다.

 

     그래서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하나님께선 최종적인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시려고 하였습니다. 이젠 어느 정도 컸는지, 당신이 택하시려는 민족의 시조로써 신앙적 자격이 있는가, 얼마나 변화되었는가 시험하시려고 했습니다. 그가 무조건 하나님에 대하여 두려움으로 순종하는지, 아니면 진정 믿음으로 순종하는지 최종 시험을 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아들을 바치라는 시험이었습니다.

 

     4.

     이 시험이 얼마나 황당한 시험이었습니까? 아들을 바치라니...?

 

     아브라함으론 이해할 수 없는 시험이었습니다. 자기가 경험으로 아는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러기에 더욱 고민이 되었을 것입니다. 자기의 경험으론 하나님은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을 철저히 미워하셨는데 이제 하나님께서 도리어 그것을 요구하시다니 뭔가 잘못된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 비윤리적인 행위를 요구하실 하나님이 아닌데..... 하나님이 자신을 속여온 것이 아닌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더욱이 무수한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백세에 이르러 겨우 하나 주시고 그것마저 죽인다면 하나님의 약속은 어떻게 되나...? 자식을 열 명 쯤이라도 주고 나서 그 중에 하나를 바치라고 했으면 모르겠는데 겨우 하나 주시고 그것마저 달랑 가지고 간다면 무수한 자손의 약속은 공수표가 되지 않는가...? 내가 믿은 하나님이 이런 공수표나 띄우는 거짓 신이란 말인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하나님의 요구였습니다.

 

     그럼에도 시험을 출제하신 하나님은 그 뒤로 아무런 말씀도 없었습니다. 아무런 힌트도, 무슨 여운도 없었습니다. 무서우리 만치 냉담하셨습니다. 기도해도 소용없는 혼돈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상황에 더욱 고민했습니다. 삼일 길을 걸어가면서 참으로 많은 고민과 번민을 했습니다.

 

     그리곤 마침내 하나님께서 지정해 주신 산에 이르자, 많은 회의와 고민 속에서 그는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결심하였고, 그것을 감행하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이렇게 신학적으로 해석하였습니다. 11:17절에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초신자처럼 두려움 속에서 순종한 것이 아니라 이젠 성숙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순종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최종 시험에 아브라함은 합격하였습니다.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합격이란 말입니다. 최종 승급시험에서 합격하여 믿음의 조상으로 흠잡을 데 없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해 온 것을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그 경외함이 두려움에서 온 건지, 막연함에서 온 건지, 본능적인 건지, 고민고민하며 스스로의 의지로 결단한 건지 하나님은 확인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비로소 하나님은 그에게 놀라운 축복, 그 후손에서 메시야가 태어날 것을 축복하십니다. 18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여기서 네 씨는 이삭이 아닙니다. 이삭으로 천하 만민이 무슨 복을 얻었습니까? 네 씨는 이삭이 아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신약 서두인 마1:1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하고 예수님이 아브라함의 씨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사건 뒤로 아브라함은 시험을 당하거나 실수를 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는 최종 시험에 합격하였기 때문입니다. 초신자에게서 성숙한 신자로 승급 시험에 합격하였고, 믿음의 조상이란 칭호를 듣기에 부끄러움이 없는 하나님의 공개적인 인정을 받았습니다.

 

     5.

     시험 받고 있습니까? 이유를 알 수 없는 괴로움을 받고 있습니까? 시험, 괴로운 것이지만 우리들에겐 필요한 것입니다. 유대의 랍비 요나단은 이렇게 말합니다. “도끼를 만드는 자는 깨진 도끼를 손가락으로 두들기며 시험하는 일이 없다. 그러나 훌륭한 도끼를 만들었을 경우에는 손가락으로 두들겨 시험해 본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악한 자를 시험하지 않으시고 의로운 자를 시험하시는 것이다.”

 

     까닭을 알 수 없는 어려움을 당하는가요? 아무리 기도해도 냉담하리 만치 하나님이 침묵하시는가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 이유가 생각나지 않는가요? 그렇다면 여러분, 한 가지는 분명해집니다.

 

     그것은 바로 시험입니다! 시험을 출제하며 답을 가르쳐 주는 이가 없습니다. 아무리 울면서 매달려도 답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사탄이 주는 시련이요 고난이라면 기도함에 따라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시고, 힘주시겠지만, 그것이 하나님께로 부터 온 시험이라면 당분간 응답은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땀을 뻘뻘 흘리며, 많은 고민과 기도 속에 직접 해결해야 하는, 답을 써야 하는 시험입니다. 자신이 결단을 내리고 자신이 순종해야 하는, 자신이 이겨나가야 하는 시험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신앙의 성숙은 시험이 없으면 이루어지지 않고, 감당하기 어려운 시험일수록 나의 신앙이 많이 성숙되어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성숙도가 승급되어 가는 것입니다. 초신자에서 중견신자로, 중견신자에서 성숙한 신자로, 축복 받는 성도로 승급하려면 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아이들이 당하는 시험과 어른이 당하는 시험이 같을 수 없습니다. 힘든 시험일수록, 까닭을 알 수 없는 시험일수록 도리어 감사하십시오. 나 같은 부족한 것을 이렇게 힘든 시험을 감당할 수 있다고 여겨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그만큼 나를 높이 평가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그러기에 야고보는 약1:2절에서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까지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신앙의 승급 시험이기 때문이요,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나를 매우 괜찮은 성도로 여겨주신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시험엔 붙고 봐야 합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하나님의 신앙 승급 시험에 패스하여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의 반열에 서기를!

 

 

2017. 08. 27 주일설교 : 양의섭위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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